돗토리 사구를 만들어 낸 일본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우리 나라 동해안의 바다 건너에 위치한 산인(山陰) 지방. 그 동쪽 끝에 이나바(因幡)•다지마(但馬) 지역이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일본해와 닿아 있고 배후에는 주고쿠(中国)산지의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다.
이 지역에 부는 혹독한 북서계절풍은 주고쿠산지에 부딛혀 산간부에 많은 눈을 내리게 한다. 바람은 검푸른 쟂빛 바다에 거친 파도를 일으켜 해안을 깍아내기도 한다. 강이 산 위의 암석을 잘게 부숴 바다로 가져와 모래를 만들고 바람이 다시 그 모래 위에 휘몰아쳐 일본 최대급의 '돗토리 사구'를 탄생시켰다.
바람이 길러 낸 '모래'의 선물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모래밭. 표정도 다양해서 호탕하다가도 평온하다.
돗토리 사구에서는 높이 차가 90미터나 되는 다이나믹한 경사면을 캠퍼스로 다양한 바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잔잔한 물결모양, 사구 표면의 모래가 눈사태처럼 미끌어져 걸어놓은 발 모양을 이루는 사렴(砂簾), 모래가 융기하여 다양한 형태를 이루는 사주(砂柱). 이 모든 풍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모래 캔버스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말등(우마노세, 馬の背)이라 불리는 거대한 모래 언덕을 올라가면 막 바다를 건너 불어온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돗토리 사구는 주고쿠 산지에서부터 암석이 강을 따라 내려오며 잘게 부서져 모래가 되어 바다로 흘러간 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시 바람에 날려 거대한 사구로 성장한 것이다.
사구의 서쪽 끝에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부증불감(不増不減)'의 연못이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수량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연못으로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이나바의 흰토끼가 몸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
거친 파도가 날라 온 모래는 돗토리 사구 뿐 아니라 바다에도 띠 모양의 긴 모래톱을 형성하였다. 덕분에 이곳 사람들에게는 파도가 잔잔한 석호가 여러 개 생겨났다.
약 2천년 전 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석호를 항구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돗토리시에 위치한 아오야 가미지치 유적에는 다른 지역과 활발한 교역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대량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유물들을 통해 당시의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하나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은 모래로 조각을 만들어 새로운 조형미를 창조해 내는 등 모래의 매력을 스스로 진화시키고 있다.
바람이 길러 낸 '파도'의 선물
돗토리 사구에서 일본해 연안을 따라가다 보면 약 50km에 걸쳐 다양한 해안 지형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거친 파도가 깍아낸 암석은 마치 조각을 한 듯 용과 사자의 약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외에도 많은 동굴과 낭떠러지, 하얀 모래로 물든 해변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낭떠러지 위나 깊이 패인 후미 등 인간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장소에는 거친 파도를 피해 점점이 생겨난 어촌마을이 존재한다. 이곳에 바다를 향해 덤빌듯 뻗어 있는 산의 낭떠러지 사이를 잇는 아마루베 철교(余部鉄橋)가 있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사람의 공생을 상징한다. 이 철교에는 하늘휴게소(空の駅)라고 불리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높은 다리 위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휴식 공간이 있어 찾아 오는 이들을 매료한다.
일본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절벽 위의 곶에 위치한 미사키슈라쿠(御崎集落) 마을은 다른 마을과 왕래가 거의 없었다. 덕분에 이 곳에는 11세기 초 권력투쟁에 져서 몰락한 헤이케(平家), 다이라 가문의 관련자들이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이 곳에서는 눈을 그려 넣은 과녁에 101개의 화살을 쏘는 '모모테노 기시키(百手の儀式)'라는 의식이 아직 남아 있다. 이 과녁의 눈은 헤이케를 멸문시킨 겐지(源氏), 미나모토 가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들 어촌마을에는 마쓰바 대게와 오징어 잡이의 거점이 되는 항구가 발달되어 있다. 사람들은 바람을 견디기 위해 이웃과 처마가 맞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집을 붙여 짓고 판자로 감쌌다.
에도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러한 건축양식은 아름다운 해안선과 함께 바람이 일으킨 거친 파도와 공생하는 인간의 삶과, 어업의 번영을 보여준다.
바람이 길러낸 '눈'의 선물
돗토리 사구의 모래를 만들어 낸 주고쿠 산지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덧 산촌마을에 도착한다. 겨울이 되면 야마유키(山雪)라고 불리는 많은 눈에 둘러싸이는 곳이다.
수 많은 깊은 골짜기 안쪽에는 짚을 엮어 만든 이엉지붕을 얹은 집들이 있는 작은 산촌 마을이 점점이 숨어 있다. 마을 한켠에는 울창한 삼림을 뒷배경으로 한 대저택이 자리 한다.
산간부의 번영을 상징하는 '이시타니(石谷) 가문'의 저택은 과거 역참마을로 번성했던 오래된 거리에 자리해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다이쇼(大正) 시대에 건축된 대저택으로 광대한 터에 7개의 창고와 40개 이상의 방이 있다.
건물 본채에 들어가면 14m나 되는 높이에 올려 놓은 거대한 대들보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러한 대저택은 에도시대부터 계속된 임업의 번영 덕에 지어질 수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채광창, 거대한 대들보와 기둥은 모두 겨울철의 많은 눈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겨울철의 많은 눈과 추위는 눈의 무게로 인해 나뭇가지가 아래를 향해 성장하는, 나뭇결이 꽉 찬 천연 삼나무를 탄생시켰다. 사람들은 이 천연 삼나무를 삽목으로 늘려 이 땅에 적합한 굵은 나무가 자라는 삼나무숲을 조성하였다.
수령이 약 350년 된 게이초스기(慶長杉)라 불리는 삼나무숲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다. 삼나무 정령이 깃든 흰 삼각형 탑을 본존으로 모시는 '스기신사(杉神社)'는 임업을 생업으로 삼은 이들의 오랜 역사와 마을에 번영을 가져다 준 삼나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술을 빚는 양조장과 가정집 처마에 매달린 삼나무 가지로 만든 커다란 구슬모양의 오브제와 한겨울 눈 등롱의 빛. 이 광경은 인공 삼나무 숲과 마을 뒷산의 천연 숲이 함께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임업 경관에서 삼나무 향기와 함께 여행자들을 맞아준다.
삼나무 목재와 목탄 등 삼림자원의 수송을 위해 20세기 초 쇼와(昭和)시대 초기에 '와카사 철도 와카사선'이 생겨났다. 개업 당시에 세워진 목조역사가 현재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종착역에 도착하면 수동 회전대를 이용하여 방향을 바꾸어 출발하던 증기기관차도 남아 있다.
역 앞에는 많은 눈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적기와를 얹은 흰벽 창고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또 가정집의 처마밑 차양을 도로 쪽으로 확장한 '가리야'라 불리는 아케이드 거리가 있고,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가 거리를 따라 흘러간다. 이 또한 대설대책의 하나이다.
1885년에 있었던 큰 화재를 계기로 주민들이 스스로 설치한 것으로 지금도 가리야 아케이드 아래에서는 눈 오는 날에도 졸졸졸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깃소리가 들려온다.
온통 눈으로 화장을 한 듯한 풍경이 잘 어울리는 이 마을 뒷편에 위치한 강의 기원을 찾아가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보게 되는 천연 바위굴에 '후도인 이와야도'불당이 자리한다. 신성함이 깃든 암굴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천년 이상을 믿어온 밀교의식을 위해 피워 올린 연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람이 부는 계절에 무사와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는 '기린지시마이'춤
이 지역 180여 개의 마을에는 뿔이 하나 달린 황금색 머리에 다홍색 의상을 걸치고 춤을 추는 '기린지시마이'춤이 계승되고 있다.
기린은 중국에서 다른 생물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상상의 동물이다. 처음으로 기린의 얼굴을 한 사자춤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 370년 전이다.당대의 돗토리 영주 이케다 미쓰나카(池田光仲)가 자신의 위대한 증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기리기 위해 신사를 창건하고 제례를 지내는 과정에서였다.
눈부시게 화려한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기린은 행복을 부르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 축제에서도 이 춤을 추고 싶어 했다.
기린지시는 그 얼굴과 춤사위 등 마을 별로 다른 개성과 형태를 지니며 이 지역에 널리 계승되어 왔다.
바람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모래와 파도, 눈의 선물을 가져다 주는 한편, 먼지와 거친 파도, 많은 눈 등 혹독한 자연과 대치해야 하는 삶을 부여하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옛부터 앞으로 맞이할 혹독한 바람의 계절에 무사와 평안을 바라는 마음과 그 계절을 무사히 넘긴 뒤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기린지시마이 춤을 춰왔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해 기린과 만난 여행자들에게도 기린의 행복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나바와 다지마는 일본해에서 불어 온 바람과 사람이 공생하는 지역이며, 사람들은 기린지시에 의지하여 모래와 파도, 눈과 같은 혹독한 자연을 받아들였다. 이곳에는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와 그들이 씩씩하게 살아남아 온 역사가 깃들어 있다.